김해 대동면 주동리 1700평,
손수 설치한 스마트팜 농장엔 재활용품 가득
30여 유럽종 포도 신재배법
기술 무상 제공, 책·자료집 내고 대학 강의도
“기후위기·환경 파괴 심각성
떠들기만 하면 뭐 하나, 친환경 행동이 먼저”
과일에 봉지 씌우기 안 해,
외형보다 맛이 중요··· “탄소중립 실천이 더 가치 있어”

[부산=환경일보] 장가을 기자 = “1930년대 인도의 물리학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는 백색왜성의 질량 한계(찬드라세카 한계)를 계산했어요. 이 발견은 별의 진화와 블랙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미래를 예측한 과학자와 블랙홀’ 얘기에서 눈빛이 반짝였다. 서병희 은기원 포도농원 대표와의 이날 인터뷰는 시시콜콜 사는 얘기부터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까지 대화의 스펙트럼이 폭넓었다.
“유럽종 포도 재배는 단기 ‘공부’가 아니라 집요한 ‘연구’가 필요해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전력을 다해야만 합당한 결과가 따르겠죠.” 인터뷰 내내 사람 좋은 웃음을 띠던 그의 음성이 서늘하고 단호해진 순간, “연 매출 얼마냐?”며 대뜸 찾아와 포도 농사 운을 떼는 이들에게 전할 메시지, 이 대목에서다.

손쉬운 날도, 평탄한 해도 없었다. 유럽종 포도 농사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포갠 지 근 30년, ‘포도 농사’에 미쳐 산 세월이다. 농장 시스템과 과실 수확에서 ‘이 정도면 됐다’는 흡족할 만한 경지에 이른 건 불과 2년 전. 그만큼 유럽종 포도 농사는 섣부른 마음으로 도전할 성질의 것이 아니란 얘기다. 긴 세월 깊은 호흡을 요하는 장기 프로젝트라 그렇다.
그가 펴낸 자료집만 해도 10여 권, 주위에 연구 내용을 소통할 이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국내에서 유럽종 포도 재배 선구자로 통하는 서병희 대표를 만나러 김해 대동면 주동리 1700평 은기원 포도농원에 닿았다. ‘은기원’이 무슨 뜻인지 묻자 “두 자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란다.
단돈 20만원으로 완성한 스마트팜 곳곳은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득한 재활용품 장비로 즐비하고, 투박하나 명민하게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제 쓰임새를 다하고 있다.

Q. 2016년 대기업 퇴직 후 ‘은기원’ 유럽종 포도 재배 농장을 설립해 인생 이모작에 성공했다. 소회가 어떤가
원래 꿈이 과학자였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고 파고들어 핵심 원리를 파악하는 걸 즐겼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논리에 맞는지 재차 확인하는 몰입의 시간 말이다. 단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한해서다. 사람들과 얽혀 시시비비를 가리고 따지는 건 사절이다. 내 관심사는 바뀌지 않는 ‘상수’다.
공대를 택한 건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취업이 잘 됐으니까. 부산대 정밀기계공학과 졸업 후 1990년 LG그룹 전자부품 연구소에 입사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9시나 10시 넘어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게 정답인 줄 알고 사는 시절이었다.
회사에 뼈를 갈아 넣은 만큼 능력은 인정받았다. 초고속으로 관리자 레벨까지 직행했으니.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계열사와 회사 분사로 옮겨 다녔다. 현장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의 경험치가 인생 2막에서 주효했다. 하찮은 일 같지만 배워 두면 언제가 반드시 쓸모를 다한다.
다들 번드르르한 대기업 다닌다고 부러워했는데 정작 나는 만족도나 행복감이 기대에 못 미쳤다. ‘월급쟁이의 비애랄까’ 회의감이 컸고 내적 갈등도 심했다. ‘퇴직하면 뭘 하지?’ 고민이 한계치에 달할 무렵 우연찮은 기회에 유럽종 포도를 맛봤다.
부산시 사하구 하단에서 농장까지 차로 30여 분 걸린다. 통상 새벽 서너 시쯤 나온다. 해 뜨기 전에 일해야 작업 효율이 높으니까. 일하는 시간은 대중없다. 보통 서너 시간 작업한다. 이제야 내 삶의 완전한 ‘주인’이 됐다. 오전 8~9시쯤 일을 마치면 집에서 쉬었다가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화창한 날은 지인들과 산에 오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훌쩍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퇴직 후 취미가 아닌 ‘직업 농부 선언’을 하니 다들 의아한 표정을 한 게 떠오른다. 일평생 전자제품 ‘연구’만 하다가 50줄 훌쩍 넘어 체력을 요하는 농사를 짓겠다니 가족도 께름칙한 반응일 수밖에. 지금은 내가 제일 부럽다 한다.

Q. 유럽종 포도와 운명처럼 만난 그 당시 얘기가 궁금하다
포도는 미국종과 유럽종으로 나뉜다. 캠벨얼리, 머루포도, 샤인머스켓 등 미국종 포도는 미국 동부가 원산지로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서 재배된다. 플레임 시들리스, 블랙 사파이어 등 유럽종 포도는 연 강수량 250㎜ 정도의 중동, 미국 캘리포니아, 호주 내륙 사막에서 재배된다. 기후 여건상 한국에서 이들 품종을 재배하기란 어려운 게 사실이다.
1999년도였나. 홍콩이나 인도, 일본 등지로 출장을 다녔다. 씨 없는 유럽종 포도를 처음 만난 건 그때다. ‘포도’는 내게 껍질을 까서 먹는 속은 물렁하고 단맛 나는 과일에 불과했다. 출장에서 맛본 포도는 색달랐다. 붉은빛을 띤 작은 알, 식감은 달콤한데 사과 씹는 것처럼 아삭했다. 씨가 없고 껍질까지 먹으니 간편하고.

순간 느낌이 오더라. ‘승산 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2000년 부산 강서구 강동동에 아버지 땅 300평을 빌려 하우스를 짓고 주말농장 개념으로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국내에는 씨 없는 유럽종 포도 재배법 관련 자료가 없어 영어권 논문만 3000편 넘게 봤다. 그중 1000여 편은 전문을 번역했고. 2013년쯤 미국 양조포도학회에 가입한 것도 관련 자료가 필요해서다. 긴 시간을 두고 탄탄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2016년 내 나이 54세에 퇴직했다.
2017년 김해 대동면 주동리 1700평 ‘은기원’ 포도농원에 500그루를 심었다. 플레임 시들리스처럼 씨 없는 유럽포도 30여 종을 재배해 현지 직판으로만 판매 중이다. 연 매출은 2억원 정도. 이 수익을 낸 것도 최근이다.
밤새 숱한 논문을 찾아가며 유럽종 포도 재배 공부를 했다. 배운 이론은 곧장 농장에 적용했다. 실패가 잦았지만 고되진 않았다. 어려운 퍼즐을 하나둘 맞추는 기분이랄까. 그 과정이 흥미롭고 신선했다. 거듭된 실패만큼 경우의 수는 줄었고 차곡차곡 성공 데이터로 정리됐다. 한 해 농사는 수확 시기인 8~9월 판가름 난다. 2023년이 돼서야 ‘이만하면 됐다’는 직감이 들더라.

Q. 탄소배출 저감에 초점을 맞춘 스마트팜 기술을 이용해 포도를 재배 중이다. 수분 등을 제어하는 기술은 물론 나무 성장을 조절하는 재배법을 만들었는데
‘스마트팜’은 최신 정보통신기술(ICT)을 농업에 접목해 농작물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환경을 제어하면서 농업 운영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혁신적인 농업 시스템을 말한다. 2017년부터 순차적으로 설치해 작년에야 완성했다. 1700평 농장에 장비 설치 비용은 총 20만원 정도. 다들 저렴한 금액에 놀라고 생각보다 더 스마트한 장비에 놀란다.

과학적인 데이터 조건 즉 토양의 양분 수치, 온도와 습도, 관수, 비료 등을 맞춰야 양질의 과실을 수확한다는 건 상식이다. 이 지역 특성상 양분이 넘치는 게 문제였다. 단기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인내심을 갖고 여름과 겨울 각각 다른 관수법으로 양분 조절에 주력했다.

낮에는 나무에 다량의 물을 투입해 광합성을 돕고 밤에는 땅의 수분을 말려 나무 성장을 억제했다. 수분 조절 기술로 나무 성장을 관리하는 신재배법, ‘은기원 포도재배법’에는 수학과 물리학, 화학 등 기계공학적 특성이 모두 담겼다.
포도의 품질과 당도가 최적기가 되는 미래 날짜를 정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전부터 나무의 수분과 시비로 세력을 조절했다. 또 시기에 따라 다른 재배법으로 나무와 잎, 과일 등 성장을 각각 억제 또는 강화해 결정적으로 최적의 맛을 만들었다. 스마트팜 구현으로 연간 수천만원의 인건비를 아꼈고 순 이윤으로 매출액이 남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포도 재배는 순치기, 덩굴손 따기, 봉지 씌우기 등 많은 손품을 요한다. 근 30년 가까이 포도 재배를 연구하다 보니 ‘덩굴손 스스로 떨어지게 하는 법’ 등 손품 더는 다양한 방법도 터득되더라. 홀로 1700평 농장을 운영하자니 손품 더는 일 또한 내게 중요했다.
Q. 포동농원 운영 중 가장 힘든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
김해 대동면 주동리 땅을 사기 전 여러 차례 사전 답사를 왔다. 주위 환경과 땅을 유심히 봤는데 몰랐다. 저지대라 태풍이 오면 침수가 잦고 유독 양분이 과한 땅이라는걸. 이미 땅은 샀고 많은 투자비를 들였으니 어쩌겠나. 방법을 찾는 수밖에.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물이 잘 빠지도록 도랑을 만들고 하우스 구조와 주변 환경을 개선했다. 또 김해시에 펌프장 조성을 계속 요청했다. 지금 공사 중인데 2027년이면 들어선다.

아까 말한 대로 양분이 과해 포도 재배가 쉽지 않았다. 2020년 수확한 포도는 고스란히 파묻었다. 양심상 도저히 팔 상품이 아니더라. 그걸 주워 가겠다고 몰래 농장에 오는 이들도 많았다. 매년 수확은 한다. 수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포도나무가 내 기대치만큼 잘 자랐는지 여부가 관건이지. 명색이 국내 유럽종 포도 전문가인데 감식안이 떨어지면 되겠나.
포도에서 캐러멜 향이 난다면 믿을 텐가. 실제 그렇다. 우리나라 포도도 맛있지만 갈수록 먹기 편한 걸 선호하기 마련이다. 수입 포도에 밀리지 않으려면 국내에서 생산해야 한다. 내가 만든 자료집만 제대로 공부해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딱 가르쳐 보면 안다. 이 사람은 포도농사를 시작하면 안 되겠구나 싶으면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시간과 돈 낭비 하지 말고 다른 일 찾으시라고.

Q. 지난 4월10일 제8회 탄소중립 에너지 대전환 포럼에도 참석했는데, 어떤 메시지를 전했나
과일 크기와 색 등을 좋게 보이려고 착색제를 사용하거나 과대 포장을 한다. 특히 선물용 과일은 모난 데가 1도 없어야 한다. 그 지점부터가 문제다. 과일을 예쁘고 크게 만들려면 생산자는 더 많은 탄소를 소비해야 한다.
나는 비료는 최소한만 쓰고 시기마다 과일에 봉지를 씌우는 작업도 하지 않는다. 외형이 좀 부족해도 맛은 특A 상품과 동급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게 내게 더 가치 있는 명제다.

상처 없는 말끔한 과일 즉 외형상 완벽한 과일을 선호하는 소비자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샤인머스캣이 붐일 때, 소비자가 알이 큰 걸 선호하니 생산자는 어마어마한 퇴비로 알을 키웠다. 크기가 커지니 자연히 당도가 떨어지고 소비자는 맛이 예전만 못하다며 예전만큼 찾지 않았다.
외형이 예쁜 과일을 만들기 위해 몇 개의 봉지를 거치는지 아는가. 재배용 봉지, 색깔 내는 봉지, 출하용 봉지 등 시기마다 봉지를 바꿔 줘야 한다. 좀 못 생기고 약간 흠집 있으면 어떤가. 맛이 최상이면 되지. ‘기후위기, 환경 파괴 심각성’ 떠들기만 하면 뭐 하나. 행동으로 바뀌는 게 없는데. 친환경을 위한 생활 속 실천부터 하고 봐야지.
농장에 있는 대개의 물건이 재활용품이다. 당근에서 중고로 구매해 필요한 부분만 고쳐 쓰거나 멀쩡한데 버려진 물건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손봐서 다시 쓰는 재미를 알까. 품을 들이면 애착이 간다. 인간 본성은 창조와 주체에 이끌리는 법이다. 포럼에서 이런 류의 얘기를 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사업을 더 확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돈벌이만 생각했다면 농장을 진작 넓혔겠지.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나 홀로 농장을 관할하고 싶다. 일일이 내 손을 거쳐 하나하나 과실을 확인하고 박스에 담아내야 마음이 개운하다.
농장을 찾아오는 이들을 상대로 현지 판매만 고수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온라인 판매를 하면 에어 포장지를 사용하지만 배송 과정에서 과일이 일부 뭉개지는 건 막지 못한다. 소박하지만 철저하게 ‘친환경’, ‘탄소중립’의 가치를 지키는 선에서 내 손으로 이룰 수 있는 만큼만 생산‧판매할 요량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멈출 수 있는 결단, 자족하는 삶이 더 충만하다는 걸 반평생 넘게 살아 보니 알겠더라.

정부 기관과 특작과학원, 시도 농업기술센터 등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2018년부터 경북농업마이스트대학 등에서 강의도 하고. ‘유럽종 무핵포도 재배기술’ 책을 출판했고 10여 권 자료집을 발간했다. 2021년부터 ‘유럽종탐구회’란 동호회도 만들었다.
다음 타자들이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좀 수월하게 유럽종 포도를 재배하길 바란다. 무상으로 기술을 전수하고 자료집을 나눠 줄 생각이다. 지금도 짬이 날 때마다 논문을 찾고 자료를 정리 중이다. 유럽종 포도 재배로 인생 2막에 도전해 평생 공부하는 맛, 일평생 일하는 멋은 덤으로 건졌다. 이만하면 꽤 쓸모 있고 괜찮은 인생 이모작,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