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당 기준 마련 ‘신뢰’ 핵심··· “공정한 룰 없인 혼란 가중”
제도 설계가 감축 성패 걸러··· 전문가 “정교한 정책 필요”

국가가 정한 탄소 감축 총량을 각 산업, 각 기업에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3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제4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 수립 방향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기후변화포럼 유튜브
국가가 정한 탄소 감축 총량을 각 산업, 각 기업에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 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3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제4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 수립 방향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기후변화포럼 유튜브

[국회=환경일보] 김인성 기자 = ‘탄소에는 가격이 없다.’ 오랫동안 한국 산업계는 이 묵시적 전제를 바탕으로 성장해왔다. 온실가스 감축은 선진국이 떠안아야 할 책임이며, 우리는 그 여유가 없다는 말도 곧잘 따라붙었다. 그러나 2025년, 그 말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3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제4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 수립 방향 토론회’는 단순한 정책 발표나 의견 수렴 절차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날 논의는 국가가 정한 탄소 감축 총량을 각 산업, 각 기업에 어떻게 나눠줄 것인지, 그리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지게 할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뜨거운 ‘정치적 협상장’이었다.

2030년까지의 기후운명, 지금 결정된다

정부가 수립 중인 제4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한국의 탄소시장 운영에 직접 영향을 주는 청사진이다. 이 계획은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달성하기 위한 중추적 수단이자, 산업계의 대응 전략을 좌우하는 실질적 ‘룰북’이다.

기획재정부와 환경부 공동 초안에 따르면, 총 배출권의 양을 줄이되 유상할당 비중은 최소 60% 이상으로 대폭 확대한다는 방향성이 제시됐다.

또한 배출권 거래제를 통한 감축 유도를 위해 거래시장 구조 개편과 차등 할당제 도입이 동시에 추진된다.

이날 발제를 맡은 이우성 환경부 기후전략국장은 “이제는 과거와 같은 무료 할당만으로는 감축 유인이 부족하다. 감축 부담은 되도록 공평하게, 그러나 실질적이게 분배돼야 한다”고 밝혔다.

유상할당 대폭 확대
“기업 생존 위협” vs “이제야 제대로 된 탄소 가격 신호”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기업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현재도 유럽 등 해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탄소 가격이 유지되고 있음에도, 유상할당이 급격히 확대될 경우 제조업과 에너지 집약형 산업은 곧바로 ‘비용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김기훈 탄소정책위원은 “지금도 배출권 가격은 톤당 3만~5만 원 사이에서 급변한다. 여기에 유상비율이 60%로 올라가면, 특히 중소·중견 기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부담을 떠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감축도 필요하지만, 한국 경제의 뿌리인 제조업이 감축의 유일한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반면, 환경단체들은 유상할당 확대를 오히려 ‘늦장 정책의 최소한의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기후솔루션의 박현주 책임연구원은 “그간 한국은 배출권을 지나치게 ‘선심 쓰듯’ 나눠줬다. 배출권은 사회적 자산이며, 탄소에는 분명히 가격이 매겨져야 한다. 지금도 유럽은 한국보다 최소 3배 이상 높은 가격에서 거래되고 있다”며, 감축 유인을 위해선 반드시 ‘탄소 비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후솔루션의 박현주 책임연구원은 “그간 한국은 배출권을 지나치게 ‘선심 쓰듯’ 나눠줬다. 배출권은 사회적 자산이며, 탄소에는 분명히 가격이 매겨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후솔루션의 박현주 책임연구원은 “그간 한국은 배출권을 지나치게 ‘선심 쓰듯’ 나눠줬다. 배출권은 사회적 자산이며, 탄소에는 분명히 가격이 매겨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산업별 차등할당제는 역차별?”··· 정교한 기준 설계 요구

새롭게 도입될 예정인 산업별 차등 할당제도 첨예한 쟁점을 만들었다. 이번 계획안에서는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산업에는 비교적 완화된 기준이, 반면 감축 여력이 더 크다고 판단되는 금융, 통신, 서비스 산업에는 보다 높은 유상비율이 부과된다.

그러나 일부 산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일종의 산업 차별”이라고 표현했다.

“똑같이 감축 의무를 지는 것이라면, 기준도 단일해야 공정하다. 산업별 여건을 이유로 비슷한 규모의 기업에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이는 기업 간 역차별 문제로 번질 수 있다.” (국내 에너지기업 C사 기후전략실)

이와 관련해 국회기후변화포럼 고문을 맡은 김재경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정교한 산업별 기준을 만들지 못하면, 이 제도는 오히려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며 “거버넌스 구조 개편을 통해 이해관계자 간 협의 채널을 상설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래시장 유동성 ‘공급 부족’··· 가격 신호는 왜 왜곡되는가?

한편 이날 토론에서는 배출권 거래시장의 근본적 구조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시장 참여자 수가 제한적이고, 거래 물량 자체가 적은 상황에서 유상할당 비율만 높이는 것은 “공급 축소 속 거래 증가라는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 2년간 등록기업 수는 정체, 거래금액은 소폭 증가하고 거래가격은 정부 정책에 따라 급등락, 실물 수요 반영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신민철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박사는 “현재의 시장은 매도자보다 매수자가 현저히 적다. 이는 가격 왜곡을 불러온다. 기업이 장기 배출권 수급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가 직접 거래시장에 개입해 ‘시장 조성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사회적 감축 계약’ 논의 본격화할까

토론 말미, 좌장을 맡은 한정애 의원(전 환경부 장관)은 “탄소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이제 감축 부담도 사회 전체가 어떻게 나눌지 고민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한정애 의원(전 환경부 장관)은 “탄소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한정애 의원(전 환경부 장관)은 “탄소는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상할당 확대는 단순히 배출권의 가격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기후위기 시대의 사회적 연대와 부담 공유'라는 더 큰 윤리적 질문을 동반한다.

탄소 감축은 기술이 아닌 제도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동의의 문제다.

탄소 가격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누가 비용을 지고, 누가 이익을 보느냐의 문제다. 유상할당 확대는 당장 기업들에게 손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확보된 재정은 저탄소 기술에 재투자되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전환의 연착륙을 가능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선순환의 구조를 시민과 기업 모두가 신뢰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일이다.

이번 국회 토론회는 단지 하나의 할당계획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탄소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우리가 어떤 사회적 합의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예고된 협상’의 서막이라는 평이다.

저작권자 © 환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