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에 담긴 생태계의 순환과 생명들의 이야기
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녹색기자단=환경일보] 백하연 학생기자 = 누군가에겐 쌀을 짓는 평범한 농경지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 된다. 바로 논 이야기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 한 그릇은 단지 농업 생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 함께 숨 쉬는 생태계의 일부다.
논은 단순한 농지일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과 자연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들어낸 독특한 생물다양성의 공간, 논 생태계를 들여다본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든 습지
논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이지만, 일정 기간 물을 담고 있는 구조 덕분에 습지의 성격을 띤다. 실제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논을 ‘인공 습지’로 분류한다. 물이 머무는 시간, 햇빛과 온도, 그리고 벼를 중심으로 한 식생 구조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으로 논에서는 올챙이, 개구리, 미꾸라지, 논우렁이, 물자라, 물방개 같은 수서생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조류와 곤충, 더 나아가 포식성 포유류의 먹잇감이 되며, 논 생태계 내에서 중요한 먹이사슬을 형성한다. 특히 맹꽁이나 금개구리처럼 논에만 의존해 번식하는 특수화된 양서류는 논이 사라지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 이들의 존재는 논 생태계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오랜 진화와 공존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생명 순환의 중심지
논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계절성’이다. 벼농사의 흐름에 따라 수분, 식생, 먹이자원의 상태가 달라지고, 이에 맞춰 생물들의 생활 주기도 조절된다. 봄에는 번식을 위해 양서류와 곤충이 몰려들고, 여름에는 식물성 플랑크톤과 수서식물들이 자라며 수생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가을이 되면 조류와 포식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논으로 몰려든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논은 생물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이동을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 서식처로 기능한다. 특히 다른 습지나 하천과 달리, 논은 사람의 손길로 유지되기에 관리 여부에 따라 생물다양성의 양과 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왜 논 생물다양성이 중요한가
논 생태계에 서식하는 생물들은 단순히 생물 목록을 채우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농업 환경의 건강성과 회복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금개구리나 논우렁이 같은 생물의 개체 수 변화는 해당 지역의 농약 사용량, 수질 상태, 습지 연속성 등을 반영한다.
또한 논 생물다양성은 농업과 생태계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개구리나 우렁이는 해충을 먹으며 친환경 농업을 가능하게 하고, 수서곤충은 조류의 주요 먹이가 되어 상위 포식자를 유지하게 한다. 생물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생태계는 안정적이고, 병해충이나 기후 충격에 대한 회복력도 커진다.
즉, 논 생물다양성은 단순한 환경 보호 이슈가 아니라, 농업의 지속 가능성 자체와 직결된 문제다.
사라지는 논, 위태로운 생명망
하지만 최근 들어 논 생태계는 점점 위협받고 있다. 대규모 개발과 도시화, 농업 기계화로 인해 논 면적은 줄어들고, 물 관리 방식의 변화는 생물의 서식 환경을 악화시킨다. 특히 농약과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은 생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농업과 생태계가 분리되기 시작하면, 결국 인간이 누리던 생태계 서비스–수질 정화, 병해충 조절, 탄소 흡수 등도 약화된다. 생물다양성의 감소는 단지 몇 종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농업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구조적 위기를 뜻한다.
논을 살리는 작은 실천들
논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일부 농가에서는 잡초를 모두 제거하지 않고, 물을 수확기 이후까지 유지하며 생물의 번식 시기를 고려한 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생물다양성 친화형 농업’으로 불리며, 생물에게 서식 공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충북 옥천군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논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비농업기에도 논에 물을 대는 ‘겨울 논물 채우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생태관광이나 생물 관찰 프로그램과 연계해 주민 참여도 유도하고 있다.
논을 다시 바라보다
논은 어쩌면 가장 오래된 ‘공존의 공간’일지 모른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이 생명의 터전을 다시 돌아볼 때다. 더 이상 ‘쌀만 나오는 땅’이 아닌, 수많은 생명이 숨 쉬는 공간으로서 논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매일 먹는 쌀 속에는 생태계의 순환과 생명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