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이 질식한다. 매년 찾아오는 장마와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녹색기자단=환경일보] 전윤빈 학생기자 = 지난해 여름, 서울 강남 일대는 기록적인 폭우로 도심이 마비됐다.
강남역과 신논현역 일대 지하철 출입구가 물에 잠기고, 도로는 침수로 차량 수십 대가 고립됐다. 서초·반포의 맨홀에서는 물이 역류했고, 동부간선도로 일부 구간은 일시 폐쇄되기도 했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당시 1시간 동안 110~140mm의 비가 쏟아졌으며, 이는 서울 기준 평균 7월 한 달 강수량(약 200mm)의 절반이 한 시간 안에 쏟아진 셈이다. 단순한 집중호우라기보다는 이례적인 기상이변의 징후로 해석된다.
올해 여름 역시 비정상적인 장마와 폭우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우는 도시 인프라나 일상의 안전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짧은 시간 내에 내리는 과도한 강수는 토양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이 발간한 도시토양관리 백서에 따르면, 짧은 시간에 많은 비가 집중되면 흙 입자 사이의 공기를 밀어내며 과포화 상태에 빠지고, 결국 불투수 포장면처럼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수분 과잉이 만든 침묵의 생태계
비가 계속되면 흙은 수분을 머금고 생물 활동이 활발해진다. 일정한 습도는 미생물과 지렁이 같은 생물에게 좋은 조건이 되며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기도 전에 지표면부터 침수된다. 도시에서는 이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지면이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덮여 있어 빗물이 땅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배수로로 흘러간다. 일부 화단과 녹지에 물이 몰리면서 토양은 과습 상태에 빠진다.
환경부의 도시토양관리 백서에 따르면, 이처럼 과도한 수분은 토양 속 공극을 물로 채우고 산소 공급을 막아, 지렁이나 선충류 같은 산소성 생물의 활동을 멈추게 한다.
그 자리를 혐기성 세균과 부패균이 대신하면서 토양 생태계는 점차 단조롭게 변할 수 있다.
장마는 수분을 공급하는 동시에, 과도하면 생물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도시의 토양은 이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다. 토양 속 생물 변화를 통해 도시 생태계의 취약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흙 속 생명의 장마수난시대
지렁이 – 지표 위로 올라온 이유
비가 내린 다음 날, 인도 위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를 본 적 있는가. 평소엔 땅속 깊이 숨어 지내던 지렁이가 장마철이면 지표면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단순히 ‘물에 씻겨 나왔기 때문’이 아니다.
KISTI 과학향기 칼럼에 따르면, 지렁이는 폐 대신 피부로 호흡하기 때문에 토양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살아남기 어렵다. 장시간 비가 내린 후 토양이 과포화 상태가 되면 공기 대신 물로 가득 찬 흙 속에서 지렁이는 질식 상태에 가까워지고, 결국 바깥으로 기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밖으로 나왔다가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이다. 도로 위에 올라온 지렁이들은 자주 익사하거나 밟혀 사라진다.
미생물 – 흙 속 균형을 잃다
흙 한 줌에는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아 숨쉰다. 이들은 식물의 뿌리에서 나오는 물질이나 동물의 배설물, 죽은 잎 등 유기물을 분해해 다시 생명으로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이 발간한 기후위기 대응 백서에 따르면, 미생물은 습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장마철의 과도한 수분은 토양 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산소가 줄어든 흙에서는 혐기성 세균이 급속도로 번식하고, 메탄이나 황화수소 같은 가스가 발생해 악취가 나며 토양 건강성이 급격히 낮아진다. 토양이 살아 있으려면 ‘적당한 숨 쉴 틈’이 있어야 한다.
곤충과 선충 – 피할 틈을 찾아 움직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곤충들도 바빠진다. 특히 낙엽 아래, 풀잎 뒷면, 흙덩이 사이에 살던 작은 곤충들은 물을 피해 이동을 시작한다.
한국생태학회지에 따르면, 장마철에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종으로 ‘톡토기’ 같은 미소 곤충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수분 변화에 예민하고, 수분이 많은 환경에서는 더 깊은 곳이나 덜 젖은 지점으로 피신한다.
토양 속 선충류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는 수분에 강하지만,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생존율을 떨어뜨린다.
환경교육센터 관계자들은 “작지만 중요한 이 생물들이 사라지면, 토양 자체의 기능도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미 – 구조물 사이로 피신한 도시 생존자
도시의 개미는 장마를 대처하는 대표적인 생존 전략가다.
국립생태원이 운영한 시민 생물조사단의 기록에 따르면, 일부 개미 군집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 둥지를 더 깊게 파거나, 아예 아파트 외벽 틈, 가로등 기둥 내부, 맨홀 주변 같은 인공 구조물로 이동해 산란지를 옮긴다.
물이 스며들기 어려운 공간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시 생태계에 매우 적응력이 강한 생물이다.
생태계 이상 징후, 땅 아래에서 시작된다
장마가 이어지는 동안, 흙은 말없이 무너진다. 비가 오면 흙 속 공기층은 물로 바뀌고, 산소를 필요로 하는 생물들은 점차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환기가 어려운 토양에서는 호기성 미생물과 지렁이, 선충류 등이 먼저 활동을 멈춘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부패균과 혐기성 세균이다. 땅은 악취를 품고, 생명의 터전이던 토양은 병원성 세균의 온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눈앞의 생태계뿐 아니라 우리의 식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남고흥농업기술센터의 2023년 보고에 따르면, 고흥의 한 마늘 재배지에서는 여름 집중호우 직후, 전체 면적의 30% 이상이 ‘뿌리썩음병’으로 폐기됐다. 수분 과다와 산소 부족으로 뿌리가 질식하면서 세균이 침투한 결과다.
수확물의 품질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경북일보 보도에 따르면, 경북 상주의 한 복숭아 농가는 2022년 장마 이후 수확한 복숭아의 당도가 예년보다 15% 이상 낮아졌다고 밝혔다. 장마는 단순한 수확량 문제가 아니라 ‘맛과 상품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도시라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다. 불투수면이 많은 도심은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지 못하고 하수도로 흘러가며, 녹지에 빗물이 집중된다. 이때 일시적으로 고인 물은 미생물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침수 피해와 함께 토양 내 생물의 서식 공간까지 줄어들게 된다. 전문가들은 “비가 지나간 도시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땅 아래는 이미 기능을 잃은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장마를 이겨내는 도시의 선택

도시가 비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대신, 흙이 그 빗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빗물정원’이다. 빗물정원은 도심 내 저영향개발(LID) 기법 중 하나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땅에 스며들 수 있도록 유도하며 침수와 열섬 현상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서울시 성북구청의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정릉천 인근의 솔샘 빗물정원은 방치됐던 도로변 자빗물정원은 빗물을 모아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 도시 침수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자투리 땅을 활용해 하루 약 10톤의 빗물을 식물과 자갈층을 통해 정화하고 있으며, 곤충과 조류가 찾는 생물 서식처로도 기능하고 있다. 서울시는 2030년까지 이 같은 정원을 150곳 이상 확장할 계획이다.
다공성 토양 구조 개선 – 시민 단체의 골목 실험
도시 토양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도 있다.
환경운동연합의 ‘빗물순환 마을 만들기’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진행된 시범사업은 골목길 일부를 투수성 블록으로 교체하고, 뿌리층과 퇴비를 섞은 다공성 토양 구조를 도입했다.
이후 물이 토양에 스며드는 시간은 평균 3분에서 30초 내외로 줄었고, 침수 면적도 절반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참여 프로그램 – 흙 관찰하기부터
흙 속 생물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립생태원은 2020년부터 ‘토양 생물 시민과학단’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들은 지역 공원, 화단, 텃밭 등에서 지렁이·개미·톡토기 등의 개체 수를 조사하고, 위치와 상태를 기록한다.
2023년 시민들의 기록을 통해 충남 서천군 지역에서 특정 선충류 개체 수 감소가 확인되었고, 이후 지역 농업기술센터가 유기물 보충을 위한 대응 방안을 마련한 사례도 있었다.
장마는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풍경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흙은 숨이 막히고, 생명은 침묵 속에 사라지고 있다.
도시의 포장면 아래에서, 농촌의 고랑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공원의 한 구석에서도 토양은 점점 생물의 터전으로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빗물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흙이 그 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가능하다. 레인가든은 땅에게 숨 쉴 틈을, 다공성 토양은 미생물과 곤충에게 새로운 집을, 시민 참여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감각을 되살린다.
장마는 매년 찾아온다. 그러나 그 장마를 어떻게 맞이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흙은 말이 없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은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도시와 자연을 잇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