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수달의 공존 방법
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녹색기자단=환경일보] 최혁주 학생기자 = ‘알고리즘이 또 나를 수달 영상으로 이끌었다.’ SNS를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볼 수 있는 댓글이다. 조약돌을 손에 쥐고 저글링을 하거나, 두 발로 서서 짤막한 두 팔을 흔드는 모습. 15초짜리 짧은 영상 속 귀여움에 우리는 무장 해제되고 홀린 듯이 ‘좋아요’를 누른다.
그런데 만약, 이 스마트폰 액정 속 아이들이 화면을 깨고 나와 우리가 매일 걷는 한강 다리 밑을 스쳐 지나간다면? 이야기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 한때 서울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 수달이 정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이는 분명 한강의 생태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건강해졌다는 명백하고도 반가운 증거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화면 속 수달에게 ‘좋아요’를 누르던 그 손으로, 한강공원의 쓰레기통을 뒤져 주변을 어지럽히고, 강변 산책로에 배설물을 남기는 ‘현실의 수달’에게도 우리는 같은 마음일 수 있을까? ‘귀엽다’라는 찬사는 어쩌면 가장 멀리서 보내는 무책임한 환호일지 모른다.
이 기사는 ‘짤’로 소비되는 동물이 아닌,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때로는 갈등하는 생명체로서의 수달을 마주하려 한다. 40여 년 만에 돌아온 이 진짜 이웃에게, 우리는 과연 좋은 이웃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그 첨예한 공존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돌아온 수달, 한강 생태계 회복의 청신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수달을 봤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믿지 않는 일종의 도시 전설과도 같았다. 어쩌다 운 좋게 스쳐 지나간 시민의 카메라에 희미하게 담길 뿐, 그 존재는 소문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뜬구름 같던 목격담은, 서울시의 공식적인 조사 발표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가 되었다.
서울시는 공식적으로 한강 일대에 최소 15마리의 수달이 안정적인 개체군을 이루어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단순 목격이 아닌, 분변 등에서 DNA를 채취하는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을 통해 개체수뿐만 아니라 개체 간 관계까지 파악한 결과다. 이제 한강은 어쩌다 길을 잃은 수달이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닌, 어엿한 그들의 집이자 삶의 터전이 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수달의 귀환이 유독 반가운 이유는 그들이 가진 특별한 지위 때문이다. 수달은 수생태계의 건강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표종’이자, 생태계 보전에 대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일종의 ‘깃대종’이다. 까다로운 미식가처럼, 수달은 풍부한 먹이와 깨끗한 물이 없으면 절대 살아가지 못한다. 즉, 한강에 수달이 산다는 것은 그들의 왕성한 식욕을 버텨낼 만큼 수많은 물고기가, 그리고 그 생명들이 살아갈 만큼 강물이 깨끗해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수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서, 수달은 한강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되찾았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과거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압축 성장의 시대, 우리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변을 콘크리트로 덮고 수많은 생명을 내쫓았다. 그랬던 한강이 20여 년간의 꾸준한 자연형 호안 복원 등 생태 복원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마침내 떠났던 최상위 포식자를 다시 품에 안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목격하는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렵게 켜진 이 청신호는 우리에게 안도감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이 소중한 생명을, 이 기적을, 우리는 과연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반가움 뒤에 숨은 그림자, 공존의 민낯

수달의 눈으로 본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거대한 장애물 코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넓은 영역을 오가며 사냥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그들의 동선 위로,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는 쉴 새 없이 총알 같은 쇳덩이를 쏟아낸다. 밤이 되면 더 선명해지는 이 '죽음의 강'을 건너려던 수달의 안타까운 로드킬 소식은, 곧 있으면 우리에게 일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위협은 도로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잘 정비된 콘크리트 제방은, 수달에겐 몸 하나 기댈 곳 없는 차가운 벽일 뿐이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조명과 도시의 소음 속에서 갓 태어난 새끼를 키워내야 하는 어미의 사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한강의 생태를 살렸다고 자부했지만, 어쩌면 우리의 편의를 위해 인간 친화적으로 길들인 공간에 그들을 초대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위협은 비단 수달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귀여운 이웃’은 때로 ‘골치 아픈 불청객’의 얼굴을 하고 우리 일상으로 스며든다. 한강공원 쓰레기통을 뒤져 주변을 어지럽히고, 산책 나온 반려견을 목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도시를 어지럽히고 피해를 호소하는 시민들 앞에서 '생태계 회복'이라는 주제와 함께 수달을 방치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다.
결국 현재의 공존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다. 수달은 도시의 구조물에 목숨을 위협받고, 인간은 야생의 습성에 일상을 침범당한다. 이는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 도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만남’을, 이 위태로운 줄타기를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할까? 언젠가 다시 돌아올 다른 모든 생물을 위해서라도 갈등의 악순환을 끊고, 모두에게 이로운 ‘올바른 관계’로 만들어나갈 방법을 우리는 찾아야만 한다.
수달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
갈등의 답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로드킬을 막기 위한 생태통로를 늘리고, 삭막한 콘크리트 제방을 자연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사회적 노력과 함께, 야생의 존재를 인정하며 먹이를 주지 않는 '성숙한 거리두기' 같은 시민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처럼 제도적 보완과 인식 개선이 함께 갈 때, 공존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수달 한 종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을 구하는 일을 넘어선다. 그것은 수달이 정점에 있는 강 전체의 생태계, 즉 수많은 생명들이 얽혀있는 생태계를 지켜내는 일이다. 수달이 살 수 없는 한강은 점차 다른 생명도 살기 어려운 곳이 될 것이며, 이는 곧 우리 삶의 환경과도 직결된다.
결국 한강으로 돌아온 수달은 우리 사회에 묻고 있다. 우리는 과연 도시의 일부를 자연에게 기꺼이 내어줄 만큼 성숙한 사회인가? 화면 속 동물의 ‘좋아요’를 누르던 손으로, 현실의 불편함과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 살아있는 성적표 앞에서 우리가 어떤 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우리 도시의 미래와 품격이 결정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