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운 정원’으로 세계 3관왕, 첼시 플라워쇼 금상 수상
해우소부터 지리산까지··· “정원은 시대와 생명 잇는 언어”
K-정원 본질 천착, 기후위기 시대 정원의 대안과 미래 제시

[부산=환경일보] 장가을 기자 = “앞으로 몇 계절이나 볼까. 일생에 단 하나의 식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죽는다면 지적인 삶,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다 간 존재일 거야.”
황지해 작가는 환경미술가이자 가든디자이너로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식재 연출과 한국의 문화적 가치를 담은 프로젝트로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1827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세계 최대 가든박람회로 지난 2023년 5월22일 영국에서 열린 ‘첼시 플라워쇼’에서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A Letter from a Million Years Past) : 지리산’으로 쇼가든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지리산 약초 군락을 모티브로 작은 개울과 약초 건조장을 품은 황 작가의 작품은 BBC에서 22분이나 전파를 탔다. “완벽에 가까운, 진정한 가든이다”라며 세계적 디자인 거장 피트 아우돌프는 극찬했고,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는 “지리산 숲 속으로 걸어가는 느낌이다”라고 호평했다.
전 세계 가든 디자이너 꿈의 무대인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한국인 최초로 3회 금상과 최고상을 수상한 그다.

정식으로 조경과 원예를 배운 적 없으나 매번 세계인의 눈길과 발길을 이끌고 결국 마음을 홀렸다. 한국다운 정원 고유의 속성을 제대로 파고들어서다. K-식물로 세계인의 마음을 훔친 황 작가의 승부수는 작품마다 생태와 환경에 방점을 찍고 특유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녹여낸 것.
’자연 치유 행복 호르몬'인 다이돌핀의 보고(寶庫)인 숲, 누구나 육체든 정신이든 인생 회복이 절절한 순간이 온다. 한 뙈기 땅에 각자의 텃밭 만듦은 어떤가. 헝클어지고 훼손된 마음밭을 토닥이고 매만지고 경작하길, 한 번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다시 거울 앞에 섰을 때 입꼬리 살짝 올라간 그대를 마주할 확률은 120%.
다음은 황지해 작가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전남 지리산 자락에서 자라 서양화를 전공한 뒤 환경미술가로 활동하다가 가든 예술로 방향을 틀었다.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초반, 상업용 조형물을 만들던 공사 현장이라고 했다
작업과 생존을 병행하는 삶이었다. 줄곧 현장에서 환경미술과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벽화를 그리다가 낮잠을 잤는데 얼굴을 간질이는 개기장과 바랭이풀이 보였다. 개기장은 잡초라 불리는 지천에 깔린 여름풀이다. 선과 형 밀도감 있는 씨앗의 치밀한 조직과 질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보다 완벽한 조형미가 있을까 했다.
식물은 뜯어볼수록 색다른 아름다움이 발견된다. 난 여전히 설치미술을 좋아하고 궁극적으로 대지예술로 갈 계획이다. 환경미술 범주 안에 가든디자인의 새 가능성과 가치를 현대미술과 접목해 더 확장된 예술 분야로 승화하는 게 바람이다.
정원은 콘텐츠가 무궁무진하고 한계가 없는 분야다. 형식이나 기법 장르를 초월해 이용자와 상호작용 한다. 끊임없이 예술 형식과 역할을 확장하고 질문을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어떤 현대미술보다 독창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분야다.
Q. 한 인터뷰에서 작품 활동에 영감을 준 존재로 어머니를 꼽았는데
따뜻하고 정 많은 분이다. 어릴 때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오면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다. 타고나길 좋은 음성을 지녀 구슬픈 노래도 잘하셨다. 빨간 앵두와 당근꽃, 파꽃이 가득하고 아침 이슬에 젖은 여린 쑥갓과 넘실대는 상추잎, 동생 기침을 멎게 하려 매년 심은 도라지가 피운 보랏빛 꽃, 벌레 먹은 배나무와 대추나무, 벌들의 군무, 배추나비의 날갯짓, 더덕 향기가 물씬 풍기던 어머니 텃밭은 그 어떤 명작보다 내 인생 최상의 걸작이었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걷기조차 힘든 어머니, 홀로 자식들 먹이느라 살뜰히 키워낸 텃밭은 지금 내 정서와 감수성의 모태다. 어머니 텃밭은 어떤 고전과 명서도 뛰어넘는 시집이자 동화책, 자연 도감이었다.

Q.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한국적’인데, 한국 정원을 무심함, 관조적 아름다움,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는 선조들의 정신적 태도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마틴 스코세이지가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차용해 봉준호 영화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했다. 정답이다.
첼시쇼와 같은 세계적 박람회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나만의 승부수를 띄워야 산다. 한국 정원만이 지닌 특별함과 고유성을 끄집어내 한국 식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2011년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해우소’, 2012년 첼시 플라워쇼에서 ‘DMZ’, 2014년 런던 미니어처 가든쇼에서 ‘독도’, 2015년 서울정원박람회에서 ‘위안부 할머니’, 2023년 첼시 플라워쇼에서 ‘지리산’ 등 다분히 한국적 주제를 택한 것도 그 이유다.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꼽자면 2015년 서울정원박람회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 명칭으로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인 ‘모퉁이에 비추는 태양’ 정원을 선보였을 때다. 소쇄원의 ‘애양단’을 편집해 만들었다. 누구나 공평하게 햇볕을 받고, 공정한 밝은 세상을 꿈꾼다는 의미가 담겼다.
어린 소녀들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린다는 건 틀린 말이다. 타인은 당사자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해하려 노력할 뿐. 그들의 아픈 역사가 묻히는 건 비극이다. 다음 세대가 그 슬픈 역사를 알고 기억한다면 이들의 슬픔이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 이 작업에 크라우드 펀딩(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나 인터넷을 활용해 일반 개인에게 투자 자금 따위를 모으는 방식)으로 시민 성금과 트리플래닛, 서울시가 함께했다.
이때 오드리햅번의 아들 션햅번 부부가 응원차 방문했다. 세월호 사건 다음 해였다. 오드리햅번 재단은 어린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진도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후드득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노랑나비를 닮았다. 황망하게 죽어간 어린 영혼들을 기억하는 숲의 탄생, 오드리햅번 재단의 도움이 컸다.

Q.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첫 작업인 2011년도 영국 첼시 플라워쇼 ‘해우소’다. 유학비로 준비한 돈을 모조리 썼다. 그래서 학교는 마치지 못했다. 가장 잘하는 게 뭔지 내 가치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바라본 시절이다. 첫 작업은 그야말로 순도 백 프로의 열정이 넘쳤다. 이후 모든 작업의 동력이 됐고.

‘해우소’는 본래 사찰에 딸린 화장실을 칭하는 말이다. ‘화장실’ 하면 악취에 더러운 곳을 떠올리는데, 인간이 살려면 잘 먹고 잘 싸야 한다. 배출한다는 건 ‘비움’을 뜻하고 비울수록 가볍고 자유롭다. 양껏 욕심을 채우는 대신 깃털처럼 가벼운 삶을 택한 선조들의 태도를 담은 작품이다. 본연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버림의 미학,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식물을 살찌우는 순환 개념을 ‘해우소’에서 전하고 싶었다.
Q.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 ‘갯지렁이 다니는 길’이다. 많은 이들의 헌신과 도움, 애정으로 완성한 정원인데 지금은 없다.
길가에 버려진 유기목을 옮겨 정원에 게이트를 밝혔고 몸이 불편한 마을 할머니의 도움으로 마당에 심은 노란 아그배나무를 옮겼다. 정원 조성에 참여한 한 석공은 손가락이 다치는 불상사를 겪었고 시간과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숱한 공무원들의 헌신과 노력이 이어졌다.
규모가 큰 만큼 문제와 갈등, 상처가 큰 작업이었다. ‘갯지렁이 다니는 길’은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정원이 사라진 이유는 많은 이들이 찾지 않아서다.

Q. 다른 질문이지만 지금 건강 상태는 어떤가, 또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건강 문제로 오랜 공백 끝에 2023년 영국 첼시 플라워 쇼로 복귀했다. 2015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건강 위험 신호는 나를 막아서는 ‘벽’이 아니라 나를 구하는 ‘문’이 됐다. 자연과 벗하는 삶에 더 가까워졌으니, 약초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때부터다.
지금은 조용한 곳에 가야 안정감이 든다. 왼쪽 귀가 안 들리고 이명이 심해 혼잡한 곳에 가면 온몸이 불편하다. 숲에서 맨발 걷기로 다시 몸의 회복 리듬을 되찾는다.
맨발로 흙길을 걸으면 오감이 명료해진다. 인간은 본래 자연과 하나다. 작은 돌부터 이끼와 큰 바위, 바위를 안은 마삭줄, 인동초, 활공하는 새와 찬란한 태양과 땅의 속살, 질박한 원시 형태의 숲 향기와 흙냄새,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나뭇잎을 갉아 먹은 애벌레 이빨자국 등등···.
자연의 품에서 불완전하고 불편한 나를 받아들였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더라. 숲에서 보낸 시간 덕에 막막한 두려움 대신 다음 단계로 발걸음을 뗄 용기 한 줌도 얻었다. 우리네 인생과 닮은 자연 덕에 회복됐다.

Q.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10년 전만 해도 영국에 가면 “너희 나라 아직 전쟁 중이지”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전쟁 국가 이미지가 강했다. 사실 언제든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니까. 그 시절 ‘정원’ 얘기 한다는 게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원은 균열되고 결핍된 곳에 생명력을 준다. 영국 옛말에 ‘지금 정원을 만들지 않으면, 30년 후 3000개의 정신병원이 생겨난다’는 말이 있다. 정원에 머물면 강퍅한 이들도 순해진다. 난 특히 발아래 작은 야생초에 자꾸 시선이 가더라.
2023년 ‘백만 년 전에 날아온 편지: 지리산’으로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세 번째 전시를 선보였을 때 “한국 정원은 고이지 않은 물, 역동적인 생명력을 품었다”라는 평을 들었다. 뭉클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세계에 K-정원을 알리려는 노력이 빛을 보는구나, 그걸로 족했다.

작품을 살펴보면 정원에 큰 바위들은 20억 년이 넘는 시간을 상징한다.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한 이 바위들은 수백만 년 동안 그 안에 어떤 형태의 사랑을 품고 있다. 바위 틈새에 작은 식물과 꽃이 피어나면서 사랑을 표현한다. 바위와 식물은 수백만 년 전 우리에게 보낸 특별한 편지처럼 보이지 않는가. ‘한국 정원만의 고유한 미’를 세계인과 공유하고 소통한 점이 큰 성취이자 기쁨이다.
Q. 작품 활동에서 영감을 준 도서가 있다면
익숙하고 소소한 일상을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 서정주 시인의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이나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꽃’, 또 최진석 교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추천한다.
동양철학의 대가인 최진석 교수는 지식의 수입국가가 아니라 생산국가 돼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발성, 주체의식에 관한 강열한 메시지로 내 마음을 달뜨게 했다.
Q. 바야흐로 기후위기 시대다. 향후 계획은
해마다 무더위가 극심해진다. 기후위기는 닥쳤고 타개책은 행동뿐인데 몇몇만 심각할 뿐 대부분 심드렁한 표정이다. 작년과 올해 가뭄과 더위로 야생화농장도 어려움이 컸다.
정원의 가능성을 다양한 가치를 품은 예술로 넓히고 우리네 땅에서 자생하는 고유한 종의 보전과 지속 가능한 정원을 끊임없이 구현하는 일, 가장 한국다운 K-정원을 빚는 일은 실상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 그 정원들이 각박한 세상에 치인 누군가에게 탁월한 ’치유 밴드‘가 된다면, 아!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황지해 작가는,
2011년 처음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 참가해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 작품으로 한국인 최초 아티잔 최고상에 이어 2012년에 ‘Quiet Time: DMZ Forbidden Garden’으로 참가해 쇼 가든 부문 금상과 전 분야 최고상인 회장상을 받았다. 또 2012년 일본 가드닝 월드컵 동상과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초청 전시에 이어 2023년 영국 첼시 플라워쇼 금메달, 2024년 싱가포르 가든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다수의 수상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