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오카(山岡莊八)가 [대망]을 쓰면서 동기를 밝혔다. 2차대전 패전 이후, 혼란 속에 방황하는 일본인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대망을 보고 그의 일관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도쿠가와를 통해, '사람은 평범하다(혹자는 도쿠가와의 신분을 들어 평범하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토요토미같은 천민이 그에 앞서 뜻을 이루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도쿠가와가 최초로 참전한 전투에서 말머리를 돌려 도망부터 했고, 가신[家臣]이 보는 데서 바지에 오줌을 싸 버린 모습을 통해, 누구나처럼 평범하면서도 신념을 관철시키면서 대망을 이룬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의도를 볼 수 있다).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있어서 그가 특별한 일을 하면서 특별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인 것이다.
평범한 중에서도 인내와 노력을 통해 그 꿈을 이룰 수 있으며,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자신 있게 노력하라고 다그친다. 또한, 혼란스럽던 일본이 마침내는 통일되고 수백 년간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려 국민에게 그런 일본을 심어 주고, 결국은 일본을 뭉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 90년대 후반이후 초(超)대작 연극 [장보고의 꿈]과 [광개토대왕]이 열띤 호응 속에 공연되었고, 여세를 몰아 일본·미국·유럽 등지로 장소를 옮기면서 지구촌을 무대로 한마당을 펼친 바 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주인공이다. 전에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조명과 논설이 역사와 인물 부문을 중심으로 하더라도, 패배의 시절과, 패자나 배신자가 중심 무대에 서는 일이 압도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나온 한(恨)의 문화니 시련의 역사니 하는 시각은 일제 강점기와 남북분단을 거치면서 그 뿌리를 단단히 내려, 우리의 사고와 행위,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절은 피할 수 없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와 문화, 승리의 기록, 시대를 경영했던 영웅호걸들이 땅속에 깊숙이 묻혀지고 불길 속에 태워지거나, 아니면 외면당한 채 소수의 주장 속에 명맥만 이어온 판국이니 말이다.
더욱이 살고 있던 시절 자체가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주린 배를 채우기에도 하루하루 힘들었던 마당에 호쾌한 기승을 부리거나 문화와 예술을 부르짖기란 말도 되지 않을 성싶다.

그렇다고 약한 면모에 치중했다 하여 자괴감에 빠질 일도 아니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할 수 있었던 시문이 조상을 욕되게 한 것이었음을 알고는, 관직에서 물러나 일생 동안 삿갓을 쓰고 천하를 유랑하며 보냈던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 1807∼63. 자연과 낭만을 노래한 음유시인이자 풍자시인)처럼 현실을 외면한 채로 살 일도 아니다. 국민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지구촌이 한마당으로 펼쳐지고, 나라간, 기업간, 개인간 할 것 없이 치열한 생존의 장(場)이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러한 사고 속에 머물러서는 미래와 21세기는 물론, 오늘을 서 있기도 힘든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살아야 하는 만큼 당당한 토대와 자랑스런 역사·문화에 대한 긍지는 물론 특히 경험과 선례, 신념과 지혜를 심어 주고 가르쳐 주는 그런 인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인물이나 사례를 외국에서 구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지구촌 시대에 그 교훈을 누구에게나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따질 것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루스벨트, 도요토미 히데요시, 칭기즈칸 등 여러 이름이 떠오르지만 우리와 와 닿지 않고, 우리에 맞는 삶의 전례로 자리잡기 어렵다. 외국인은 할 수 있지만 '한국인이, 우리가, 내가' 할 수 있다는 토대가 없고, 위에서 예를 든 사람들은 우리의 국토를 짓밟거나 우리 운명을 자의적으로 결정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나 초등학생에게 늘상 외국 사람만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인물을 찾으면, 그를 통해 오늘의 본보기로 유용한 지식과 선례가 나오고, 동아시아지역과 태평양시대의 정세와 대처, 미국과 영국 등 더러는 믿어 마지않는 이들의 비정한 양면(물론, 우리가 그 입장에 섰더라도 그리 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근세 일본의 조선 점령을 묵인하면서, 미국은 필리핀, 영국은 인도에서의 점령권을 양해받으면서 막대한 실리를 얻어 갔다)을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는 제대로 잘 살아 나가는 데 유용한 빛과 소금같은 값어치있는 존재인 것이다.

무엇보다 미래의 주역이고 내일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보고, 배우고, 닮고, 되고 싶은 인물이 우리 속에 있어야, 바로 따를 수 있고 선조를 잇는 새로운 인물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누구나가 꼽을 수 있는 외국의 인물을 감당할 이름이 우리 역사 속에 반드시 있다는 점이다.
가려지고 덮여져서 찾기 어려울지언정, 발굴하고자 노력한다면 새로운 인물은 발굴되고, 지금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라면 더욱 더 내용이 채워지고 윤기가 있어져서, TV드라마에서 64부작을 하더라도 충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무엇보다 반성할 점은 바로, 선조에 대한 망각과, 망각에서 벗어나 바로 세워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의 부족이다. 아직도 김부식, 김종서, 이병도에 의해 태워지고 묻혀지고 외면당한 역사가 복원되기에는 많은 언어학자와 역사가가 필요하지만, 여전히 친일파와 패배주의적 사학자, 이들의 사관을 따르는 이들이 학계나 언론계 등에 박혀 있다. 붙드는 시대래야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이고, '한민족은 글렀다', '약하고 분열한다'는 등 도움하나 되지 않는 근거 없는 논설을 풀어놓으며 논리의 틀에 꿰어맞추기에 여념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대에서는 일본인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외국인이 숱하게 등장하면서 시대를 주도하고, 우리의 조상은 빌붙거나, 조그만 사건이나 벌이다가 죽어 가면서 우리 가슴을 갑갑하게 짓누른다.

그런 중에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스럽다. TV드라마나 기획제작 PD, 이문열·최인호·정립·이환경 등 소설가, 교수였던 가정주부 이영희, 김산호·이현세와 같은 만화가 등이 진흙땅 속을 헤매면서 진주를 찾고, 알알이 꿰어 목걸이를 만들 듯 역사를 메워 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면면을 드러내면서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프랑스 등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한 권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자국인이 아닌 경우가 아예 없거나 드물고, 외국인은 기껏 있어야 패배자, 특히 화려한 자기 승리의 초라한 상대방으로 등장하는 수가 대다수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시·군 정도를 움직였던 조그만 성주나 영주였고, 초라한 문화를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수도 허다하다. 일본의 전국 통일은 1603년, 에도(도쿄)시대를 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와서이고, 프랑스의 건국도 원시 상태의 프랑크족이 3C 이후 정주하면서 이루어졌다. 그시절 전후의 숱한 인물이라야 고만고만한 지역이나 무대에서 놀았던 고만고만한 사람이다. 오다 노부나가나 나폴레옹이 호령하던 영토라고 해야 연개소문(?∼665. 장군, 대막리지. 당의 장안 점령 후 태종의 항복을 받고, 산서·하북·산동·강소지역을 넘겨받아 고려진 세움)이 누비던 무대에 비하면 일부다. 역사와 문화, 중국인의 사고, 우리에 맞는 접근과 대응은 나폴레옹을 백날 바라봐야 나오지 않는다. 연개소문을 보면 줄줄이 나온다. 그런 만큼 우리 속에서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작업에는 우리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몇 대를 넘겨가야 할 지도 모르는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의 질곡을 벗어나고 있다. 우리 내부에 웅크리고 앉아 조소하던 패배주의자들과 세계인의 눈을 놀라게 하면서 말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과 88년 서울올림픽이 어두운 패배의 틀을 깨어 버렸고 2002년 월드컵은 그 결정타였다. 그러면서 패배의 과거는 거의 극복되었고, 이제는 과거의 상흔을 지워내는 한편, 남북통일로의 지향·선진국 진입·경제 대국과 강대국의 위치 확보를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이제는 이를 뒷받침하면서 더욱 힘차게 나갈 수 있는 밑받침 토대가 있어야 할 때다. 특히, 물질적인 요소의 성장을 정신적인 부문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절실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의 내적 역량이 정신세계를 긍정적인 발전의 길로 가도록 이끄는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승리의 기록이라서, 시원하면서 밝고 즐거운 역사와 인물이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50, 60년대에 걸쳐, 온 한국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원나라에의 패배, 임란과 호란, 일제 강점기에 남겨 놓은 상처와 유물이었다. 그러던 중,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역사를 뒤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80년대 초반까지는 [장길산], [백정], [화척], [임꺽정], [태백산맥] 등 약자의 힘겨운 삶에 치중하고 있었다. 오늘을 사는 이에게 물어보라.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위치이자 역할이자 사람이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부터 이지함(토정. 1517∼78. 학자. 천문역학·풍수의 대가.「토정비결」지음), 정약용(다산. 1762∼1836. 대석학, 실학의 대가. 508권의 책을 남김), 박지원(1737∼1805. 정치가, 학자. 북학파의 영수.「利用厚生」의 실학 주장), 김병연, 김시습(1435∼93. 문장가) 등 시대의 전면에 나섰다기보다, 패배하거나 주역이 되지 못한 이들이 관심을 끌었다.

시나브로 90년대부터 광개토대제(375∼413. 정복군주), 연개소문, 장보고(?∼846. 신라 장군. 해상왕.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 등 힘차게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리라고 본다. 다만, 이제는 더욱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단순한 미화가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재현이 있어야 하겠다. 군주·정치가와 군인에 국한할 일도 아니고, 한민족이 가장 약화되었던 조선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시대에 국한할 일은 더욱 아니다.

을파소(?∼203. 고구려의 명재상), 양지(신라 선덕여왕대의 중. 문장·조각의 대가), 원효(617∼86. 불교의 한국화·토착화에 노력한 고승), 장영실(세종대의 대과학자. 인쇄술·천체기기·제련·농기구·무기 등에 걸쳐 위대한 과학적 업적 남김), 주시경(1876∼1914. 한글학자.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등 한글 중흥의 선구자로서 과학적 체계 세움), 허준(1546∼1615. 의성[醫聖]. 16년에 걸쳐「동의보감」지음) 등 다방면의 인물을 밝혀 내고, 그들의 손길 속에서 이어져 온 오늘까지의 역사를 구성하여, 우리의 모습을 조명하고 더 나은 창조와 발전으로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미지의 세계로 탐험하듯 백제의 문학가, 발해의 건축가를 찾아 내자.

아울러 역사속의 인물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도 주목하고 찾아 내야 할 것이다. 독일에서 활약하는 21세기형 한국인을 찾아 내자. 그리고, 그의 이름을 소중히 하면서 세계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자.
2002년 월드컵 이후 세계인은 한국인을 반가운 마음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제 세계인 누구든지 인물에 대한 사례를 들고자 할 때 한국인을 인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쉽고 편리하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한국인에 관한 자료를 잘 정리하여 제공하는 일은 우리의 즐거운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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