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두 번째로 밤이 밝은 나라 한국, 국토 89% 이상이 빛공해 노출

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강 다리를 수놓은 불빛과 한강 위에 비친 화려한 불빛들 /사진=환경일보DB
한강 다리를 수놓은 불빛과 한강 위에 비친 화려한 불빛들 /사진=환경일보DB

[녹색기자단=환경일보] 최혁주 학생 기자 = 한강 다리를 수놓은 불빛, 빽빽한 아파트 숲이 뿜어내는 인공의 백야(白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강물. 우리는 이 도시의 잠들지 않는 야경을 발전과 안전의 상징으로 여기며 익숙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SNS에 ‘#서울야경’을 검색해 좋아요를 누르는, 그런 흔한 밤의 풍경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이 화려한 빛의 커튼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생명의 숨통을 조이는 비단 올가미가 되고 있다면 어떨까? 질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본 기억은 언제인가. 한여름 밤, 풀숲을 울리던 귀뚜라미나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은 있는가?

어느새 우리의 밤에서는 별과 어둠, 그리고 여름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러브버그들을 제외한 작은 생명들의 노랫소리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빛 공해’라는 이름의 소리 없는 재앙이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조금 부신 수준의 불편함이 아니다. 누군가의 밤을 통째로 훔치고, 생명의 나침반을 고장 내며, 수억 년간 이어져 온 자연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을 무너뜨리는 보이지 않는 습격이다.

이 기사는 우리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밤에 대한 추모사이자, 화려한 도시의 조명 뒤편에서 벌어지는 생태계의 비명에 대한 고발이다. 안전과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기꺼이 외면해 온 빛 공해의 민낯을 마주하고, 진짜 좋은 밤이란 무엇인지 그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빛의 감옥에 갇힌 생명들

인간에게 길을 밝혀주는 도시의 빛은, 어떤 생명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감옥의 벽이 된다. 그 감옥 안에서, 수억 년간 이어져 온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들이 힘을 잃고 있다. 여름밤의 낭만을 상징하던 반딧불이와 개구리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비극이다.

어둠 속에서만 허락된 반딧불이의 빛은 종족의 명맥을 잇기 위한 필사적인 ‘사랑의 언어’다. 수컷은 빛으로 구애하고 암컷은 빛으로 응답하는, 섬세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찾아낸다. 하지만 도시의 밤은 이들의 대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잠들지 않는 가로등과 간판 불빛은 그들의 속삭임 옆에서 고함을 치는 것과 같다. 이 ‘빛의 소음’ 속에서 서로를 찾지 못한 암수는 결국 다음 세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빛이 앗아가는 것은 시각적인 소통만이 아니다. 한여름 밤의 생명력을 상징하던 개구리들의 우렁찬 합창 역시 인공조명 아래 힘을 잃는다. 밤을 낮처럼 바꾸는 빛은 개구리의 생체 시계를 교란하여 지금이 번식할 때임을 잊게 만든다. 생명의 환희로 가득 차야 할 연못은, 위험을 감지한 개구리들이 입을 닫으면서 침묵이 내려앉은 무대가 되어버린다.

이렇듯 도시의 밤은 너무 밝다. 그 빛은 길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서로를 고립시키고 생명의 대화를 가로막는 차가운 감옥의 횃불일 뿐이다.

세계 2위 빛 공해 국가

앞에서 살펴본 생태계의 침몰은, 사실 우리가 받아 든 부끄러운 성적표의 일부일 뿐이다. 2016년 한 국제연구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국토의 89% 이상이 빛 공해에 노출되어 G20 국가 중 최악의 수준이자,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밤이 밝은 나라다. 화려한 성장의 불빛 뒤에 가려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민낯이다.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이미 존재한다. 2013년부터 시행된 「빛공해 방지법」이 그것이다. 법은 지자체가 조명 환경 관리구역을 지정하고 과도한 조명을 규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법의 존재가 문제 해결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법전 속 글자들은 여전히 밝게 빛나는 도시의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법의 촘촘하지 못한 그물망에 있다. 법의 규제는 지정된 구역 내의 일부 옥외 조명에 한정될 뿐, 밤새 불을 밝히는 수많은 상가와 아파트 단지의 조명은 그 감시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법이 현실의 모든 빛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빛 공해는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빛 공해의 민낯은, 법의 구멍과 그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현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경고음은 이미 충분히 울리고 있다. 이제 질문은 ‘우리가 이 문제를 아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빛의 스위치를 내릴 용기가 있는가’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밤

창 밖 은하수 /사진=AI 생성
창 밖 은하수 /사진=AI 생성

화려한 야경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외면해 온 생태계의 비명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세계 2위 빛 공해 국가라는 부끄러운 현실과 법의 구멍을 확인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빛 공해 문제와 마주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소등이나 인위적인 어둠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해법은 불필요한 빛은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고, 필요한 빛은 더 현명하게 사용하는 좋은 빛에 대한 사회적 고민에서 시작된다. 생체리듬을 교란하는 차가운 백색광 대신 생명에게 친화적인 따뜻한 노란빛 조명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단순히 어두운 밤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온전히 쉴 수 있는 건강한 밤이다. 밤하늘의 별을 볼 우리의 권리, 그리고 수많은 생명이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갈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밤하늘의 별뿐만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더불어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당신의 창밖을 밝히는 빛은 과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빛인가? 그 빛의 스위치를 잠시 내리거나, 커튼을 치는 작은 행동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 그 작은 고민과 용기가, 우리가 잃어버렸던 진짜 밤을 되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찾은 밤하늘에서,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갔던 은하수를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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