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추, 죽절초, 상동나무 이야기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에코나우는 생물자원 보전 인식제고를 위한 홍보를 실시함으로써 ‘생물다양성 및 생물자원 보전’에 대한 대국민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된 ‘생물다양성 녹색기자단’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매월 선정된 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녹색기자단=환경일보] 김효현 학생기자 =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은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한 국가 생물다양성 연구기관으로, 우리나라 섬과 연안 지역의 생물자원을 보전하고 연구하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2020년에 개관한 이곳은 해양·연안·도서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들의 가치를 탐구하고, 그 활용 가능성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3가지 식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흑산도 비비추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흑산도 비비추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바닷바람을 견디는 보랏빛, 흑산도 비비추

여름이면 서해 먼바다 흑산도의 절벽 위에서 보랏빛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로 ‘흑산도 비비추’다. 이름만 들으면 흔한 원예종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흑산도 비비추는 세계에서 단 하나, 우리나라 흑산도에서만 자라는 고유종이다.

섬의 바람은 거세고, 바닷물은 늘 습기를 머금고 있다. 그 속에서 흑산도 비비추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버틴다. 잎은 두텁고 잔털이 있어 수분을 오래 머금고, 짙은 녹색의 줄기는 짠 바닷바람을 견딜 만큼 질기다. 그 위에 피어난 보랏빛 꽃송이는 여름 흑산도의 거친 풍경 속에서 유난히도 선명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흑산도 비비추가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지 말이다. 한정된 서식지, 기후변화, 그리고 관광 개발로 인한 훼손이 겹치면서 이 꽃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전문가들은 “흑산도 비비추가 사라진다면, 이는 단순히 꽃 한 종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 생태계의 한 축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산도 비비추는 여전히 꿋꿋이 여름을 맞이한다. 바위틈 작은 흙을 붙잡고, 거친 바람을 마주하며, 고유한 생명력을 이어간다. 그 모습은 마치 척박한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삶을 닮았다.

보랏빛 꽃잎을 흔드는 흑산도 비비추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 섬에서만 살 수 있는 작은 생명이지만, 그 작은 생명 하나를 지킬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섬의 여름을 수놓는 작은 꽃.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물음은 결코 작지 않다.

죽절초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죽절초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잎새 사이에 숨은 약초, 죽절초 이야기

이름만 들어서는 대나무와 닮은 풀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죽절초(竹節草). 줄기에 마디가 있어 마치 대나무의 절간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대나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풀이다. 작은 풀 한 포기가 지닌 이야기는 의외로 깊고 묵직하다.

죽절초는 우리 들판과 산기슭에서 흔히 자란다. 키는 크지 않고 꽃도 화려하지 않아,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민간에서는 이 풀을 귀하게 여겼다. 특히 뿌리줄기에서 추출한 즙은 피를 멎게 하고, 열을 내리며, 몸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약으로 쓰였다. 농경사회에서 다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약방보다 먼저 찾은 것이 바로 죽절초였다.

더 흥미로운 점은 죽절초의 ‘이름 속 은유’다. 대나무 마디처럼 질기게 이어진 줄기의 모습은 예로부터 꿋꿋한 생명력을 상징했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산속에서 죽절초를 만나면 "험난한 삶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복"을 뜻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죽절초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약국의 약이 자연의 약초를 대신하면서, 길가에 무심히 밟히는 잡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의 눈길은 여전히 이 풀에 머문다. 죽절초에 들어 있는 성분이 항암 효과나 항산화 작용을 가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상비약이었고, 지금은 실험실 속 연구 대상이 된 풀. 죽절초의 운명은 변했지만, 그 안에 깃든 생명력만은 여전히 꿋꿋하다. 우리의 발밑에 있는 작은 풀 한 포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첫걸음 아닐까.

상동나무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상동나무 /사진=김효현 학생기자

늘 푸른 나무, 상동나무에 담긴 이야기

겨울이 되면 대부분의 나무는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하지만 남쪽 바닷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상동나무는 다르다. 이름 그대로 ‘늘 겨울에도 푸른’ 나무다. 차가운 바람에도 변치 않는 잎을 간직한 모습은 예로부터 장수와 정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상동나무는 제주와 남해안의 따뜻한 기후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북쪽에 사는 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하지만 남쪽 사람들에게 상동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입구의 상동나무에 제를 올리며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잎을 손가락 사이에 비벼보면 은은한 향이 난다. 예전 사람들은 이 향 속에 약성을 발견했다. 잎과 열매를 말려 진통과 소염에 활용했는데, 약이 귀했던 어촌에서는 상동나무가 곧 마을의 ‘자연 약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후변화와 개발로 상동나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는 특성 탓에, 온난화 속에서도 오히려 서식지가 위협받는 것이다. 늘 푸르렀던 나무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도록, 보전과 관심이 필요하다.

상동나무는 단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바람을 막아주던 삶의 지혜였고, 질병을 다스리던 민간의학이었으며, 마을을 지켜주던 믿음이었다. 늘 푸른 잎처럼, 이 나무에 담긴 이야기도 오래도록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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