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강국’ 외치기 전 국가 전력의 질부터 바꾸자
[환경일보] APEC 2025 정상회의를 앞두고 글로벌 인공지능(AI) 빅테크들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랑하는 혁신의 그늘에는 여전히 거대한 탄소발자국이 드리워져 있다.
AI가 새로운 산업혁명의 심장으로 부상했지만, 그 심장은 여전히 화석연료로 뛰고 있다. 세계 반도체의 4분의 3을 생산하는 동아시아는 AI 혁신의 핵심 거점이자 기후위기의 최대 진앙지로 떠올랐다. 기술의 속도는 빠르지만, 전환의 속도는 그에 한참 뒤처져 있다.
그린피스의 최근 보고서는 이 불균형의 현실을 수치로 드러냈다. 엔비디아와 AMD, 구글, 애플 등 AI를 주도하는 글로벌 빅테크 10곳 중 7곳이 공급망 탄소 감축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데이터센터는 그나마 재생에너지로 돌리려는 시도가 있지만, 반도체와 부품 생산 단계에서는 여전히 석탄과 가스가 주요 동력원이다. 혁신의 상징이 기후 부문의 불량 생산자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직접 연결된다. 반도체와 AI 칩 생산이 몰린 한국은 글로벌 기술 생태계의 한 축이지만,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는 여전히 OECD 하위권이다. 구글과 애플이 중국·대만에 수백 메가와트 규모의 태양광을 직접 투자할 때,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공급망 펀드나 공동투자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기술 중심지는 됐지만, 에너지 전환의 지도에서는 빠져 있는 셈이다.

APEC CEO 서밋은 이런 현실을 바로잡을 외교의 장이자 경제협력의 시험대다. 이번 회의의 핵심 의제 중 하나가 ‘청정에너지 전환과 공급망 복원력’인 만큼 기업과 정부는 단순한 기술 협력 선언을 넘어 재생에너지 중심의 산업 구조 개편에 대한 실질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한국이 기술력뿐 아니라 전환정책에서도 선도적 모델을 제시한다면, 이는 향후 아시아 공급망 협력의 표준으로 작동할 것이다. 국내 산업계 역시 탄소감축을 규제의 부담이 아닌 시장 진입권으로 인식해야 한다.
AI 칩 제조 전력 수요는 2030년까지 170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처럼 공급망의 탄소를 외면한 채 생산만 확대한다면, 결국 기술력보다 탄소비용이 더 큰 리스크로 돌아올 것이다. 한국이 ‘AI 강국’을 외치며 투자를 유치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전력의 질부터 바꿔야 한다.
기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기술 그 자체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AI의 윤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에너지에서 시작된다. 혁신의 무게만큼 책임의 무게도 커진 지금, 빅테크가 보여줘야 할 리더십은 더 빠른 칩이 아니라 더 깨끗한 전기다.
APEC의 무대는 다시 한번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자리다. 이번에는 ‘AI 산업의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의 모델을 제시할 차례다. 기술이 미래를 이끌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성 없이는 그 미래도 오래가지 못한다. 기술의 속도를 자랑하기보다 전환의 책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