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익 파트너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환경일보] 모든 화학물질은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가진다. 특정 용도로 사용될 때는 귀한 원료이고 필수적인 자원이지만, 잘못 다루어질 때는 환경과 인체에 해로운 폐기물이나 오염물질이 된다. 환경법이 폐기물과 자원을 구분하여 별도의 관리체계를 만드는 이유는, 물질 자체의 유해성 때문이 아니라 그 관리와 처리 과정의 통제 가능성과 위험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원재료 자체의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고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다.
최근 정부는 순환경제 활성화를 위해 ‘순환자원 지정제도’를 시행했다. 그중에서도 전기차 폐배터리는 순환경제의 핵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순환자원으로 인정된다. 환경부 고시에 따르면, 전기차 폐배터리는 물리적으로 손상이 없고, 셀을 분해하지 않은 채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으로 재사용하거나 재제조 할 때만 순환자원으로 인정된다. 즉, 파쇄나 습식침출 공정을 통한 재활용은 처음부터 폐기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배터리의 물리적 상태를 중심으로 간편하게 자원과 폐기물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 자원 순환과 환경 보호의 측면에서 볼 때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투박한 접근이다. 그 결과, 첨단 재활용 기술을 통한 원료 회수와 자원의 재순환을 통한 산업의 확장성은 오히려 제한된다.
그렇다면 순환경제를 추진하고 있는 유럽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EU는 배터리를 일관되게 ‘폐기물’로 본다. 심지어 재활용 목적이라 해도, 중고 배터리는 명백한 폐기물로 간주된다. 그런데도 유럽이 순환경제 강국인 이유는, ‘폐기물이냐 자원이냐’는 개념 정의가 아니라 전과정(LCA: Life Cycle Assessment) 기반의 환경성과 관리 체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EU 배터리 규정은 2031년부터 신제품 배터리에 반드시 코발트 16%, 니켈·리튬 6%, 납 85% 이상을 재생원료로 의무적으로 사용토록 규정한다. 또한, 포터블 배터리의 회수율은 2027년까지 63%, 2030년까지 73%를 달성해야 하고, 리튬 재활용율은 2031년까지 80% 이상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을 어기면 시장에서의 판매가 제한될 수 있고, 인증 실패 시 유통 자체가 차단된다. 기업의 재활용 기준 충족 여부는 인증기관과 데이터 플랫폼에서 검증되고,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통해 비용의 실질적 부담은 생산자에게 돌아간다. 원료의 선정, 설계, 제조, 판매, 유통, 사용, 폐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유해물질 함량 제한, 재활용을 용이하게 하는 재질과 구조 선택, 물질 회수율 진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유럽의 구조는 재활용 산업에 자력 생존의 위험을 전가하지 않는다. 대신, 생산자와 수입업체에 명확한 책임과 비용을 지우는 방식으로 산업의 생태계를 설계한다. 재활용업체는 환경성과에 대한 공정관리 기준을 충족하면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책임의 구조’가 산업 생태계를 견인하는 바늘이며, 재활용 시장은 그 바늘을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순환자원 지정은 규제완화의 방향은 담고 있지만, 구조는 비워져 있다. 순환자원으로 지정되면 폐기물 규제를 받지 않게 되지만, 동시에 환경법적 공법규제에서도 벗어난다. 재활용을 전제로 한 폐배터리는 여전히 폐기물이며 순환자원으로 지정될 수 없고, 별도로 회수율 기준 등 성과기준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순환자원 지정은 시장의 자율성과 경제성을 무기로 재활용업체에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할 사업위험만 남긴다.
누가 책임을 지고,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비용을 분담할 것인가. 사용 후 배터리 산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통합법 제정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되겠지만, 보다 정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특히, ‘성능평가’를 통해 재사용·재제조·재활용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을 구체화하고, 사업자의 법적 책임과 인증, 비용지원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생원료 인증제를 도입할 경우 유럽처럼 인증 실패 시 시장진입이 불가능하도록 연계되어야 선순환 구조가 마련될 수 있다.
순환경제는 ‘폐기물이냐 자원이냐’는 개념 정의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기술과 관리능력의 발전으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파쇄된 배터리도 충분히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라는 비용부담과 책임구조를 바늘로 삼아 재활용산업이 공정과정에서 세밀한 환경·안전 기준과 성과관리 목표를 준수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재활용산업의 생태계를 견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