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기 경희대학교 교수(전 대한설비공학회장)
[환경일보] 장마철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딜레마에 빠진다. 에어컨을 켜자니 너무 춥고, 끄자니 실내는 금세 끈적하고 꿉꿉한 습기로 가득 차게 된다. 특히 최근 지어진 고단열 주택이나 건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단열 성능이 좋아 외부 열 유입은 적은 반면, 여름철 고습한 외부 공기가 유입되거나 실내에서 발생하는 습기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불쾌감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냉방과 제습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에어컨은 공기를 차갑게 식혀 이슬점 이하로 떨어뜨림으로써 습기를 물로 응결시키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공기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온도는 적정한데 습도만 높은 날씨, 혹은 겨울철 난방 시 과도하게 건조한 공기 등 온도와 습도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 생활의 쾌적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끈기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명가들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비행기, 전화기 등 시대를 바꾼 수많은 발명품들이 그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번뜩이는 천재성 뒤에 과학의 기본 법칙을 간과하는 위험한 유혹이 도사리기도 한다. 바로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는 영구기관에 대한 도전이다. 수많은 발명가들이 이 불가능한 꿈에 매달렸지만,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례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학계에서는 영구기관을 ‘발명가의 무덤’이라 부르며 경고한다.
“온도는 그대로 두고 습도만 떨어뜨리는 것이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습기(수증기)를 제거하는 것은 물로 응결시키는 상변화를 동반하며, 이 과정에서 잠열이라는 열에너지가 반드시 방출되기 때문이다. 일반 에어컨이 공기를 냉각시켜 제습하는 이유도 이 잠열을 포함한 공기의 총 열량을 함께 제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온도 변화를 최소화하면서 습기만 제거하는 기술은 분명히 가능하며, 이는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는 잠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거나 이동시키는 고도화된 기술의 영역에 해당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하이브리드 데시컨트 제습 시스템이다.
특히, 최근 개발된 저온 재생이 가능한 고분자 제습제(데시컨트)를 활용한 방식은 이 기술의 핵심이다. 기존 제습 로터가 실리카겔 등을 이용해 100℃ 이상의 고온 열원을 필요로 했던 것과 달리, 이 고분자 제습제는 50℃ 정도의 낮은 온도로도 재생이 가능하다는 큰 장점을 가진다. 이 낮은 재생 온도는 시스템 설계에 혁신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전환점이다.
상상해 보라. 기존 에어컨의 압축기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응축기 방출열은 그동안 단순히 외부로 버려지는 폐열이었다. 하지만 이 고분자 제습제는 바로 이 50℃ 내외의 응축기 폐열만으로도 충분히 재생이 가능하게 된다. 즉, 에어컨이 냉방을 하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열을 버리지 않고 제습 로터의 재생에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 효율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발전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증발기) 실내 공기는 증발기를 통과하며 온도가 낮아지고, 과도한 습기가 1차적으로 응결되어 제거된다. 이 과정은 일반 에어컨의 냉각 및 제습 원리와 유사하다. (고분자 제습 로터) 증발기를 거쳐 온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습도가 높은 공기는 고분자 제습 로터를 통과하게 된다. 여기서 제습제가 남은 습기를 효과적으로 흡수해 공기를 쾌적한 수준으로 건조시킨다. 이는 공기 중의 미세한 습기까지 제거해 더욱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 (응축기) 압축기를 거친 뜨거운 냉매는 응축기를 통과하며 열을 방출하는데, 이 열은 외부로 단순 방출되지 않고 바로 고분자 제습 로터의 재생 열원으로 공급된다. 이 순환 과정은 에너지의 재활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냉각과 1차 제습은 증발기가, 완벽한 2차 제습은 데시컨트 로터가, 그리고 로터의 재생열은 응축기가 제공하는 삼위일체 방식은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다. 기존 에어컨 대비 절반 이하의 전력 요금으로 쾌적한 실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온도를 과도하게 낮추지 않으면서도 습도만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으니, 여름철에도 “추운데 꿉꿉한” 불쾌감 없이 진정한 쾌적함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사용자 경험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요소이다.
이처럼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기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러한 하이브리드 제습 시스템은 아직 시장에서 ‘고효율 기기’로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바로 현재의 에너지 효율 기준과 건축물 설계 기준이 ‘온도’에만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느끼는 쾌적성은 온도와 습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이다.
하지만 현행 건축 관련 법규나 설비 효율 평가에서는 습도 제어의 중요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냉난방 기기의 성능을 평가할 때 에너지 절감 효과가 큰 잠열(습기) 처리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시장의 외면을 받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초기 투자 비용이 다소 높더라도 장기적인 에너지 절감과 쾌적성 향상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치 있는 기술인데도 말이다. 이는 혁신 기술이 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쾌적함’의 기준을 온도를 넘어 습도로까지 확장해야 할 때이다. 정부와 관계 기관은 실내 환경의 종합적인 쾌적성을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효율 및 성능 평가 기준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불쾌지수(DI)뿐만 아니라 예측 평균 온열감(PMV) 등 습도를 포함한 지표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혁신적인 제습 기술들이 시장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적 뒷받침이 이뤄진다면, 저온 재생 고분자 제습제를 활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에너지 절감이라는 국가적 목표 달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동시에 모든 국민이 여름철 과냉방과 습기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쾌적하고 건강한 실내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시대를 열게 될 것이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이제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발맞춰 나갈 차례이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